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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스케를 이끌었던 선구자이자 명보컬 이승철은 66년생 올해 53세이며 167cm 65kg A형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수원대 기계공학과 중퇴로 알려져있으며 슬하에 딸이 2명이 있습니다고 하네요

부활의 2대 보컬이자 1집 보컬로 데뷔. 부활의 1대 보컬이었던 김종서가 부활로 활동한 지 6개월도 되지 않아 탈퇴하게 되자 김태원은 부활 공연을 팬이자 스텝 겸으로 따라다니던 아는 동생 이승철에겐 새 메인보컬을 구해야하니 좀 도와달라고 하였는데요, 이승철은 자신이 보컬로 부활에 들어가고 싶다고 강력하게 어필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승철에겐 노래를 시켰는데 생각보다 잘 하였고 몇 차례 객원보컬 형식으로 쓴 후 정식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승철의 홈피에 가보면 자신이 김종서의 후임으로 임명된 것은 어머니의 돈줄 때문이었습니다는 얘기를 농담처럼 적어놨으며, 해피투게더에 참석해서는 처음에는 거절당했으나 당시 교사였던 어머니에겐 1년 연봉만큼의 돈을 빌려서 음악 장비를 준비했더니 받아주었습니다는 얘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때부터 김태원과 이승철의 수십년에 걸친 애증관계가 형성됩니다.



그리고 데뷔 때부터 부활은 양홍섭 작사/작곡의 희야로 메가힛트를 치게 되고, 당시 최고에 대중성을 지닌 록밴드로 떠올라네요. 단 밴드의 특성상, 다른 멤버에 비해 이승철이 얻는 집중이 90%에 달했습니다. 어느 정도냐면 부활하고 




김태원은 몰라도 이승철만 아는 사람이 수두룩할 정도로, 예능에 김태원이 나왔을 때도 이승철이 밴드에 들었었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한마디로 밴드 부활이 아닌 이승철의 밴드였습니다는 말. 당시 이승철은 잘생긴 외모덕에 여성팬도 많았으며, 노래 외에도 여러 TV/라디오 방영에 참석해서 수준급의 입담을 과시하며 아이돌급 관심을 누렸네요.



하지만 몇년 지나 김태원이 마약 복용으로 인해 교도소에 가고, 이승철이 팀을 떠나면서 부활은 허무하게 해체됩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김태원과 이승철의 말이 갈리는데요, 김태원은 이승철이 떠나 해체되었습니다고 주장하는 반면 이승철은 매니저의 광고 참석료 착복으로 합의하에 부활을 해체하고, 다시 부활이라는 이름으로 된 밴드를 만들지 않겠다고 결정했습니다고 합니다. 이는 이후 당시 매니저였던 백강기씨가 자신의 블로그에선 부활을 해체하면서 더이상 부활이라는 밴드이름은 쓰지 않고, 김태원은 '더 게임'으로, 이승철은 단독으로 활동하기로 합의봤다라고 포스팅한 바 있습니다. 단, 이승철은 손무현과 '걸프렌드'라는 그룹을 결성했습니다. 이후에 단독으로 데뷔했습니다.



이승철은 단독으로 데뷔하자마자 선풍적인 관심을 끌었는데요,  농담반진담반으로 이 기간에 박명수가 이승철 흉내를 내고 다녔고, 그래서인지 잊혀지지 않았습니다고. 이승철 자신도 방영에선 박명수와 연관된 질문이 나올 때마다 자신을 흉내내주던 박명수에겐 고마움을 표하곤 했으며, 당시에도 박명수가 1999년 자신의 단독 1집에 수록한 이승철의 대표곡인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네'라는 




노래를 듀엣으로 부르자는 제안에 이승철이 흔쾌히 수락해주어 심각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박명수 또한 이런 이승철의 도움이 자신에겐 있어 만년 잊지 못할 고마움이라고 추억하기도. 이후 이승철 딸과 박명수 딸이 같은 유치원에 다니기도 해 친해졌습니다고 합니다.



전성기 기준 훌륭한 보컬리스트. 특유의 배음과 깔끔한 발음[딕션]으로 노래의 섬세한 부분을 표현하는 데 있어 장인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억양과 리듬을 넣으면서도 멜로디적인 부분 또한 줄어들지 않고, 거기에 그만의 음색이 더해져 노래의 분위기를 살려줍니다. 흔히 이승철 노래에선만 느껴지는 특유의 '맛'이 있는데요, 이것이 이승철이 부른 노래를 타 가수들이 불렀을 때 쉽게 느낌이 살지 않는 이유 중 하나. 일명 '말하듯이 노래합니다'의 좋은 참고 사례일지도.

몽롱하면서도 퇴폐한듯한 느낌 속에선도 또랑또랑 잘 전달되는 가사가 이승철만의 독특한 감성을 불러 일으키는데 한국인의 감정과 매우 잘 맞는 느낌이라 가히 일가를 이루었습니다고 할 수 있습니다.